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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론서: 무한화서

by 북노마드 202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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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글쓰기 작법서 하나를 들고 와 봤습니다.


이런 식의 글쓰기 작법서를 읽은 지는 꽤 오래 되었다. 내 책장에는 젊은 시절 수집해 놓은 수십 권의 글쓰기 작법서들이 - 시 잘 쓰는 법, 시나리오 작법 노하우, 문장향상 100선, 소설 잘 쓰는 방법, 하루키처럼 쓰는 법 등등 - 꽉 차 있다. 그 잡다한 습관을 내려놓은 건 방법론을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것'을 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은 이후였다(아침형 인간을 시작하고 나서 모든 자기계발서가 필요 없어진 것과 같은 이치다).

몇 해 동안의 나는 많은 소설들을 읽고, 습작을 하면서 그 스스로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알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은 것들에 대해 갈망 때문이지, 묵은 때가 쉬이 지지 않은 것처럼 남아 있는 관성 탓에 가끔 작법서 코너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무한화서.

이성복 시인의 시론서이다.

화서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킨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꽃차례.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가 있고,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가 있다고 한다.

#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 무한화서 p.11

시론서이기 때문에 시짓기에 대한 짧은 조언들로 가득차 있다. 언어, 대상, 시, 시작, 삶이라는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 470개의 아포리즘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2년에서 2015년 대학원 시 창작 강좌 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라고 한다).

10여년 전의 나의 글들은 교조적이었다. 자기계발서에 심취해 있던 나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교훈을 발견했고, 나보다 더 어린 친구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비록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딴에는 그네들보다 더 오래 살았고, 더 많은 책들을 읽어왔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얼굴이 뻘개질 정도로 창피한 내용들이 많고, 지금은 그에 대한 반성 탓인지 교조적인 것들을 꺼려한다.

시 창작 강좌를 엮은 책이라 책의 내용이 대다수 교조적이라, 거부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이제는 이런 조언들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조금은 알아버려서인지, 아니면 나이가 더 먹은 탓에 내 나름의 원리원칙이 굳건해진 탓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조언이 마음을 치는 것들이 많이 있다(*나는 그의 글에서 '시'를 '글'로 치환해서 읽고 있다).

# 6. 체험이 풍부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에요. 그건 시가 쓰는 사람 내부에 있다는 오해에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고 시가 대상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대나무의 본질을 알려다가 마음병만 얻었다는 '격물치지'의 일화도 있잖아요. p.13

# 34. 구어에는 언제나 리얼리티가 잇고 리듬이 살아 있어요. 또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쌀일에 쌀눈이 붙어 있는 것과 같아요. 가령 사람들이 쌍욕 하는 소리를 들으면, 리듬과 이미지가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지 알 수 있어요. p.23

# 41. '얼굴'이라는 말보다 '쌍판'이라는 말이 훨씬 실감나지요. 구어는 활어예요. 비어, 속어, 은어는 시의 보고예요. p.25

# 50. 우리의 손은 언제나 진실을 말해요. 손을 신뢰하면서 가급적 신속히 쓰세요. p.28

# 71. 그냥 머릿속에 지나가는 생각들을 적어보세요. 쉽게 쓰는 것이 지름길이에요. 거창하게 인간의 운명에 대해 얘기할 것 없어요. 그런 건 내가 안 해도 벌써 다 나와 있어요. 그냥 우리 집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만 쓰세요. p.35

# 73. '우리 형' 같은 제목은 참 좋지요. 삶의 온 무게를 끌고 다니는 말이에요. 길바닥에 파인 물고랑처럼, 그 안에 온갖 고단한 삶이 다 들어와 있어요. p.36

# 102. 시를 쓰는 건 멋진 비유들을 엮어내는 게 아니에요. 가령 소월의 '산유화'는 어느 부분에도 비유가 없어요. 꽃 얘기이면서 인간 얘기이기 때문에, 그 차체로 비유인 거지요. p.47

# 119.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가장 쓸모 있는 거예요. 이걸 알아차리려면 계속 반복 훈련해야 해요. 축구선수들 연습하는 것 보셨지요. 호루라기 불자마자 바로 돌아서잖아요. p.53

# 121. 글을 쓸 때 잡생각을 받아 적어보세요. 일상에서 잡생각은 시에서 진실이고, 일상에서 진실은 시에서 잡생각이에요. 우리가 쓸데없다고 버리는 것 안에 우리 자신이 가장 많이 들어 있어요. p.54

# 127. 신기한 것 찾아다니지 말고 평범한 것들을 오래 지켜보세요. 발도 오래 물에 담가두면 묵은 때가 벗겨지잖아요. 좋은 작가는 평범한 일상이 '기네스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p.56

이주 전부터 매주 주말에 차를 몰고 어디라도 훌쩍 여행을 다녀올까, 싶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반복되는 단조로운 생활에서는 이렇다하게 새로울 게 나올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요. 번개를 맞는 일이 일어나면 목숨은 위태롭겠지만 그래도 꽤나 삶이 다채로워질 것 같은데, 이런 생각 말이죠.
 
무한화사, 를 읽고 나서는 늘 차로 다니던 식당까지 차를 두고 걸어가 봤습니다. 가는 길에 늘 끼던 이어폰도 빼 버리고 간만에 세상을 돌아보았습니다. 산책을 하는 가족들, 어르신들이 보였습니다. 엊그제 술에 취해 갔던 동네 노래방 주인 아저씨가 보이길래 민망해 슬쩍 시선을 돌리기도 했지만요. 단조롭고, 볼 게 없는 일상이라고, 미리 단정해 버려서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여수나 경주, 경포대 정도는 다녀 와 줘야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하여 직장생활의 다이나믹을 아예 쳐다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네요. 물론 이런 한숨 돌리기도 책을 접고 나면 얼마 가지 않겠지만요.

그렇지만 잘 되지 않지만, 교조적으로 들리지만, 그 말에는 동감합니다.

일상이 가장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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